1. 국외자(L'etranger)

étranger [ etʀɑ̃ʒe ]
형용사
1.외국(인)의
2.외교의, 국제관계의
(주어는 사물) 낯선, 생소한,무관한
(주어는 사람) (에) 관심이 없는, (에) 어두운,(와) 관계가 없는
명사
1. 외국인
2. (어떤 집단에 대한) 외부사람, 국외자(局外者)
요란한 엔진음으로 실내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작동 직전의 거대한 기계 안에 들어 와 있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승객분들은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느리게 이동하던 기체는 한 곳에 가만히 멈춰 섰다.
모두 앞을 향해 앉은 사람들은 상기돼 있었고, 승무원들은 이륙준비로 부산스러웠다.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해 보이는 회색빛 활주로와 창을 반절로 나눈 새파란 하늘.
언젠가 잡지에서 본 북유럽의 작은 마을 같은 회색빛 고요한 풍경이었다.
'이 많은 사람, 이 무거운 기체, 가득 실은 짐, 12시간을 날아갈 연료...괜찮을까.'
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한 시간 전 공항에서 가족과 인사, 그동안의 벗어나고 싶은 기억,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각오와 기대 등의 복잡한 생각들은 거추장스러워졌다.
계속 시끄럽던 엔진음은 한 단계 커지고, 잠시 뒤에 더욱 커졌다.
'무서워'
살기 위해 떠나는데, 그와 동시에 죽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이 곳에 남는 게 좋을까.
아니, 좋지 않은 질문이었다.
차라리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는 도전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역사에 남을 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기체를 흔드는 소리가 더욱 커질수록 불안 또한 같이 커져갔다.
옆자리엔 예민하게 생긴 50대 초반의 남성이 영자 신문을 여유롭게 보고 있었다.
그래, 그 사람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평소 숫기가 없었지만, 지금은 말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제 손 좀 잡아주시겠어요? 제가 비행기가 처음이에요. 저는 놀이기구도 못 타는 사람이에요.'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전에 유럽까지 가는 긴 시간 동안 작은 좌석에서 있는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는 얘기들을 본 적이 있어서 출입문 앞으로 티켓을 예약했다.
그렇게 출입문 바로 앞자리를 선택한 이유로, 내가 눈 앞에 바로 보이는 건 스튜어디스의 얼굴이었다.
뒤로 쓸어 넘겨 머리를 쪽져, 부드러운듯 하면서도 단아하고 차가워 보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옆자리의 아저씨처럼 여유로워 보이고 싶었다.
피융~!
고탄력 고무줄을 세게 늘렸다 놓으면 빠르게 수축하는 것 처럼 기체는 달려나갔고 등받이에 몸이 달라 붙었다.
두 날개의 엔진음은 더욱 거세졌고, 마른땀이 났으며, 창 밖의 북유럽 풍경은 요동치고 있었다.
엔진음이 절정으로 치닫고, 불안은 극도로 치달았을 때, 들어올려지듯 사뿐히 날아올랐다.
벗어버리고 싶었던 내 모드 굴레를 원심력, 중력과 함께 이 땅에 내려놓았다.
'그래, 난 자유로워질거야.'
뒤로 기울어진 기체는 거세게 진동하며 더욱 박차를 가하며 고도를 높였다.
비행기는 이착륙 때 제일 위험하다는 기사를 봤던 것이 잠잠해진 불안을 흔들었다.
어느 때 보다 지금의, 앞으로의 스스로가 기대됐기에 더욱 생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심장은 귀에서 들릴만큼 거세게 뛰고 있었고, 이 심장소리가 엔진음에 섞여 들리지 않길 바랬다.
비행기는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몇 미터일지 몇 백미터 일지 모를 높이를 떨어지듯 내렸다 오르기를 반복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그 높이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어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두려움이 터져나왔고 팔걸이를 꽉 잡았다.
왜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번 비행기를 타 본 것 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온 나즈막한 비명으로 모든게 탄로난 것이다.
바로 앞에 앉은 스튜어디스가 자신을 보고 웃는것을 느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그런 인간이었다 생각했다.
가족, 친구, 주변인, 주변인이 아닌 모든사람을 신경쓰며 살았다.
그들의 기분을 살피느라 내 기분을 모른척했고,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후순위였다.
껍데기 뿐인 인생이었던 것이다.
생에 가장 큰 도전을 하는 동시에, 지나온 삶 중에 자신의 생명에 가장 큰 위협을 느끼고 있는 순간에 자신의 인생이 남을 위한 인생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스 타이밍.
이럴수가, 아찔했다.
기체는 다시 아래로 뚝 떨어졌다.
덕분에 먼곳까지 갔던 정신은 다시 요동치는 기체로 돌아왔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생존본능.
나에게도 생존본능이란 것이 있었다.
평상시엔 감춰져 있다가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 발현되는 생존본능.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행위.
심하게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수록, 내 안에서 균열이 점점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휙하고 날아오른 기체는 흔들림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좌석 위에 떠오른 빨강색 밸트표시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거짓말 처럼 내부는 조용해졌고, 진동도 거의 없어졌다.
기체는 높이 높이 날아올라 안정권에 다다른 것이다.
하늘 아주 높은 곳.
지상보다 우주에 더 가까운 곳.
'무사했다.'
그래, 커다란 고비를 넘긴 것이다.
결단을 내리고, 생사를 넘나든 고비를 견뎌냈다.
안도감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긴장감에 과한 힘을 줬던 팔과 다리는 저려왔다.
앞자리에 앉은 스튜어디스는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옆자리 아저씨는 언제 풀었는지 허리춤의 안전벨트도 풀고, 활주로에서 이륙준비를 할때 부터 지금까지 여유있는 모습으로 영자신문 한장 한장을 느릿하게 넘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화장실을 가는지 어슬렁 거렸고, 짐칸을 열어 짐 정리를 했고, 알 수 없는 언어들로 재잘거렸다. 잠깐이지만 작은 사무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고, 한뼘짜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땅 위의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집들만이 작은 점들로 보였고, 그마저도 하얀구름뒤로 멀어져갔다.
한국땅이 점점 멀어졌다.
한국에서의 삶이 멀어져갔다.
무사히 이륙해서 안정권에 접어든 지금은,
누군가는 누리지 못한 타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지금은,
인생을 건 모험을 시작한 지금은,
행운일까, 모든 부분이 일반적으로 작동하는 일상적 상황인가,
아니면, 누군가 갖지 못한 기회일까.
운명인 것일까.
운명이라면, 그것에 나를 맡겨보리라 생각했다.
당장은 그래야만 했다.
이 무거운 쇳덩어리에 몸을 맡긴채 날아가고 있으니, 별 수가 없었다.
창 아래로 하얀 구름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그 보다 높이 뜬 태양에 눈이 부셨다.
창에서 눈을 돌려 좌석 앞에 시선이 멈췄다.
네모난 간이 식탁이 접혀져 있었고, 그 아래로 항공사 홍보물 책자와 광고물이 꽂혀 있었다.
그 중에 기다랗고 모퉁이가 해져 몇겹의 종이가 보이는 기내식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미디어에서 보았던 기내식은 맛있어보였고, 뭔가 특별해서 군대에서만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 같은 느낌도 들었다.
몹시 허기를 느꼈다.
비행기를 타야한다는 긴장감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생존본능은 비행기가 이륙한 시점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도 외국도 아닌, 낯선 국외자가 된 채로, 이 후의 일들에 대해선 생각도 못한채로 당장의 네번의 기내식을 각각 어떤 것으로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