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원에서 받아 든 기숙사 주소지에 앞에 도착한 시간, 19시 48분.
이미 커다란 이민가방의 바퀴 두 개는 부서지고, 바퀴를 고정하는 쉬마저도 닳아버려 가방의 한쪽 바닥은 지면에 닳아 있었다.
조금만 더 이동했다면, 가방의 내용물이 닳아버린 이민가방 아래로 쏟아져 나와 벼룩시장처럼 거리에 옷가지들과 소중하게 싸 온 고추장과 각종 양념들을 늘어놓을 뻔했다. 아찔했다.
'113 Rue Jean Jaurès, 92300 Levallois-Perret'
기숙사 주소.
한국에서 생각하는 기숙사의 느낌과는 달랐다.
아니, 한국에서도 기숙사 근처엔 가본적도 없었기에 한국의 기숙사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TV에서 본 기숙사의 이미지와 달랐던 것이다.
부드럽게 연마된 대리석이 건물을 감싸고 입구로 보이는 곳의 큰 유리창 너머로 한국으로 치면, 경비원의 자리처럼 보이는 곳에 50대의 후덕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 뒤로 촘촘하게 늘어선 금색의 우체통들이 있었다.
하얀 종이로 이름들이 써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내 이름도 저 우체통 중 하나를 차지하겠지.'
숙소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가, 그는 건물입구 통유리 앞에서 생각을 이어갔다.
여유로운 미소로 건물관리인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어학원에 다니며, 장을 봐올 땐 한 손에 바게트 한 덩이를 들고 이 문을 지나며 또 저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가볍게 하고 지나가겠지.
이상적인 유학생의 모습이었다.
'끽끼이이이', '끼이이이이이'
오는 내내 바닥에 가방 끌리는 소리 때문에 창피함이 최대치까지 끌어 오른 참이었다.
이제 이 무거운 가방들을 방에 내려놓고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다.
유리문을 열려고 하는데 열리지 않았다.
옆에 보니 쇠판에 숫자를 누를 수 있는 것이 붙어 있었다.
바로 출입 디지코드를 누르는 것이었다.
어학원에서 한국인 상담직원이 말해줬던 출입번호.
넘겨받은 종이에 쓰여있는 주소 밑에 있는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7,2,7,3,... 엔터? 확인? 입력? 이런 버튼이 뭐지???
숫자판엔 입력한 숫자를 넣고 확인이랄까 입력이랄까 그런 버튼 이 안보였다.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동양 남자가 커다란 가방들을 들고 출입문에서 얼쩡거리자 유리창 너머에서 수상하게 바라보는 관리인 아주머니랑 눈도 마주쳤다.
도둑이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뉘앙스의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숫자판에서 입력 버튼을 찾았다.
숫자 누르는 단순한 소리와 긍정과 부정 중, 부정의 소리만 났다.
번호가 틀렸나.
다시 종이를 들여다봐도 숫자는 맞았다.
허둥지둥 대며 이제는 웃음도 나지 않았다.
젠장,
한국말로 욕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쉬운 게 하나도 없는 프랑스 삶.
이제 유학, 프랑스생활의 첫날인데, 운명이 있다면 첫날부터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몇 번째 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출입번호를 눌렀을 때쯤 관리인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어학원에서 받은 종이를 들어 보였다.
체형만큼 무거운 움직임과 걸음으로 관리인은 유리 출입문으로 다가왔다.
'... 잠깐, 뭐라고 말하지?'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말을 할 줄 몰랐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덩치가 더 커 보이는 아줌마가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asldkfjsldkfsadlkf??"
"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작정 주소와 디지코드가 적힌 종이를 들이밀었다.
아줌마는 한숨을 쉬며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알 수 없는 말로 누가 들어도 욕일 것 같은 뉘앙스로 소리를 질렀다.
그 언어는 말랑말랑 부드러운 프랑스어가 아니었다.
내가 프랑스말은 잘 못해도, 어느 나라말인지는 구별은 할 줄 알았다.
동유럽 쪽 언어 같았다.
다큐나, 영화를 보면 나오는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 같았다.
동유럽 언어로 욕을 한 바가지 먹고 있었다.
붉은 곰 같은 그녀는 종이의 주소를 손가락으로 찍으며 내 눈앞에 엑스표시를 강하게 했다.
그리고 건물 옆에 적힌 번호를 가리켰다.
'78'
종이에 적힌 주소는 '119'
"아...어떻게 78과 119을 착각할 수 있지?"
".... 아,,죄송, 어,, 익스큐즈 므와, 데졸레 마담..."
알고있는 불어를 끌어모아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얼굴이 붉어왔고,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관리인 아줌마는 찻길 너머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눈치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뉘앙스를 파악했다.
"멕시, 오흐브와."
'끽끼이이이', '끼이이이이이'
이민가방이 길에 끌리는 소리를 다시 냈고, 어슴프레 어두워진 하늘, 짙은 파란색의 가을저녁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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