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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L'amour Paris

3. 성층권 (La stratosphère)

by panicmonk 2023. 11. 5.

 



모든 계약사항을 확인하고 어학원 문을 나오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어학원 맞은편의 작은 호텔이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몇 차례 이 호텔 앞을 지났던 골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 시간 동안 어학원을 찾아 헤매었던 그는 한국에서 지도를 보는 보직을 맡아 군생활을 했고, 덕분에 지금껏 살아오며 길을 찾는데에 꽤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에 금방 어학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프랑스의 도로체계는 한국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지금껏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의 첫 번째 배반.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배반을 당할까.
오랜 시간 동안 참이라 알고 지냈던 것들, 익숙했던 것들, 내 것, 내 경험들에 대한 배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공항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담배와 라이터들이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오래된 편두통이 시작되는 것 같았고, 엉뚱한 대상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한 어리석음에 짜증이 밀려왔다.
담배를 사고 싶었지만 어디서 담배를 판매하는지 몰랐다.
한국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편의점에서 쉽게 담배를 살 수 있었는데, 여기선 어디서 사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껏 어학원을 찾아 헤매었는데 담배 파는 곳을 찾아서 이 바퀴가 빠지고 바퀴를 고정하는 쇠까지 닿아버린 커다란 이민가방을 끌고 갈 자신이 없었던 게 맞을 것이다.
목이 말라왔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한낮에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는 등 위로 그럴듯한 이국적인 동양화 스타일의 하얀 산맥을 그려놓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쉽지 않겠지만 이번엔 기숙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얼른 기숙사에 도착해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깨끗한 침구가 깔린 침대에 앉아서 시원한 맥주를 한잔하고 싶었다.
서둘러야 했다.
내가 학습이란 것을 하는 인간이라면, 기숙사 찾기는 조금 전보다는 더 수월해야 했다.

낮에 길을 헤매며 되뇌었던 후회들.
왜 이곳에 와서,
난 내 인생의 무게만큼의 짐을 끌고,
뜨거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파리거리의 대리석 건물 숲을 돌고 돌아야 했는가,
무엇 때문인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왜 찾지 못했는가,
꿈을 찾아온 이 땅에 도착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반나절의 시가 만에 비워진 꿈의 공간에 후회가 채워지고 있었다.

"저, 혹시 한국인이세요?"

또 그랬다.
자신을 후회와 자책의 시커먼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틀 정도만에 듣는 고국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한국인이세요?"

멍청한 대답이었다.
한국말을 하는 동양인, 일본인이 운영하고, 다른 어학원에 비해서 학비도 싸고, 덕분에 동양학생들이 많다고 소문난 이 어학원 앞이라면 당연히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한국사람이지 않을까.
게다가 조금 전 어학원 안내데스크에서도 한국인 담당자인 한국인 아줌마와 예약사항을 확인하고 어학원 위치까지 한국어로 자세히 듣고 나온 참이니, 이곳에서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이 한국사람일 확률은 명동에서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이 한국인일 확률과 같지 않았을까.

"이제 막 도착하셨나 봐요. 저도 지난달에 왔거든요."

그녀는 한국인이냐는 말엔 답을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녀도 딱히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파리에선 동양인이 많기에 중국인, 일본인과 구분하기 위해서 묻는 인사말 같은, 한국인만 하는 피아식별의 의식 같은 질문이어서 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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